리지 보든 사건의 미스테리 -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의 미스테리 -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폴 리버에서 69세의 앤드류 보든과 그의 아내 애비 보든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둘의 죽음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사람은 이들의 둘째 딸인 리지 보든이었으며 피해자들의 저항과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내부인의 범행으로 수사망이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사건 당시 첫째 엠마는 친구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고 현장 주변에 있었던 보든 가의 하녀 브리짓도 일관된 증언으로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인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둘째 딸 리지 보든은 달랐습니다. 브리짓과는 다르게 증언이 계속해서 달라졌고 결정적으로 며칠 전 마을 약국에서 청산가리를 구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의문점들이 해소되지 못하면서 리지는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1893년 6월 20일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범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앤드류 보든은 공장, 은행 및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겐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폴 리버 지역에서도 고급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더 힐(THe hill)가 대신 현재의 집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리지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더 힐가에 거주하기를 갈망했으며 가톨릭 이민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지금의 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리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더 힐가로 이사하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살인 당일 리지는 헛간에서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3층 다락방에서 쉬고 있던 보든가의 아일랜드 하녀 브리짓 설리번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소리쳤고 길 건너에 살고 있는 의사의 집에 가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리지의 바로 옆집에는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폴 리버 시내에서 의사로 재직하고 있던 남자 대신 길 건너에 살고 있는 미국 의사에게 브리짓을 보냈습니다. 물론 리지는 집 뒷편 대각선 쪽에 살았던 프랑스계 캐나다인 의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리지 보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리지는 부유한 중앙 회중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으며 리지의 학급 사람들은 리지와 같은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죽였을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찰관과의 심문 중 리지의 답변이 바뀌었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 모습에 경찰이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며칠 전 마을 약국에서 청산가리를 구매하려고 시도했음을 발견하면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기소되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사건 당일 여동생 에마는 15마일 떨어진 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집에는 아버지 앤드류와 새엄마 애비 그리고 리지와 브리짓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앤드류가 아침 업무를 마치고 잠시 나간 사이 애비가 2층 객실에서 살해당했고 나갔다가 돌아온 앤드류는 1층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앤드류가 살해당하고 있을 당시 브리짓은 3층에 있는 그녀의 다락방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리지의 동선만이 유일하게 불분명했기에 판사, 지방 검사 및 경찰청장은 ''리지가 유죄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리지는 사건 발생 일주일 후인 8월 11일에 체포되었고 판사는 리지를 카운티 교도소로 보냈습니다.

 

 

 

 

 

 

 

 

 

리지의 체포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여성 기독교 절제 연맹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리지의 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힐가의 하우스 오르간인 폴 리버 이브닝 뉴스는 리지의 결백을 옹호했지만 노동 계급 아일랜드 일간지인 폴 리버 글로브는 리지를 살인자로 묘사했습니다. 첫 번째 예비 심리에서는 보스턴에서 가장 저명한 변호인 중 한 명이 그녀의 결백을 옹호하기 위해 나섰고 경찰서 위층에 있던 작은 법정에는 리지의 지지자들 특히 더 힐가의 여성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검찰은 피해자들의 두개골에 있는 상처 크기와 일치하는, 보든 가의 지하실에서 입수한 도끼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이미 물에 닦아져 있는 상태인데다가 당시 기술로는 잔여 혈흔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는 ''도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피가 사방으로 튀었을 텐데 리지의 옷에서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도끼에서도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를 응원했던 여성들은 큰 박수를 터뜨렸지만 판사는 아직까지도 리지가 유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상급 법원 재판까지는 투옥되어야 한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12월 1일 리지의 절친한 친구 앨리스 러셀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살해된 직후 리지는 브리짓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앨리스를 데려오라 말했고 집으로 오게 된 앨리스는 그 후 며칠 동안 리지와 함께 생활했었습니다. 법정에 선 앨리스는 모든 것을 증언했지만 한 가지의 중요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락시킨 세부 정보를 말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던 그녀는 지방 검사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다며 변호사와 상의를 했고 결국 리지가 식료품 저장실 벽장 선반에서 드레스를 꺼내 난로에 태웠다는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배심은 다음날 리지를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남성이 모든 법적 권한을 보유한 법정에서 리지는 무력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리지는 아버지의 돈으로 자신을 변호할 최고의 법률 팀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지방 검사도 그가 직면한 법적, 문화적 장애물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배심원단은 검찰에게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제시했습니다. 폴 리버의 주민들은 배심원 풀에서 제외됐고 농경지가 많은 작은 마을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배심원의 절반은 농부였으며 나머지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고 있었으며 일부는 리지의 나이대로 보이는 딸들을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배심원단은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들은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한 시간을 더 기다렸습니다.

 

 

 

 

 

 

 

 

법정 청중 및 대부분의 언론 그리고 여성단체는 리지의 무죄판결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뉴 베드포드의 배심원단이 리지 보든 양에게 기소된 잔혹한 범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범죄를 담당하는 무지하고 훈련되지 않은 남성들의 허영심'', ''공소를 확보하고 재판을 진행한 폴 리버 경찰 당국에 대한 규탄''이라는 기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무죄 평결을 받고 나서부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리지와 동생 에마는 더 힐가에 있는 빅토리아풍 주택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교회 사람들까지도 그녀를 피해 다녔고 그곳의 아이들은 리지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는 보스턴, 뉴욕, 워싱턴 DC를 여행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극장 관람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리지와 그의 동생 애마는 1927년 같은 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래는 미국 어린이들이 줄넘기 놀이를 할 때 부르는 리지 보든에 관한 노래입니다.

 

Lizzie Borden took an axe(리지 보든 도끼를 집어 들었네)
(And) Gave her mother forty whacks(엄마에게 40번 도끼질을 했네)
When she saw what she had done(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을 때)
(She) Gave Her father forty one(아빠에게 41번 도끼질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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