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비행기 납치 1971 하이재킹 사건과 DB쿠퍼 + 항공 보안

최초의 비행기 납치 알리는 1971 하이재킹 사건과 DB쿠퍼 + 항공 보안

오늘날 항공 보안 프로토콜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1960년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발생한 수많은 하이재킹의 물결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 기간 동안에만 평균 5일에 한 번씩 하이재킹이 발생했으며 미국은 범죄를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꺼려하는 공항 경영진들에게 공항 보안 프로토콜을 채택하도록 설득했습니다.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중 하나인 <<D.B 쿠퍼 : 공중에서 사라진 사나이>>의 주인공 DB쿠퍼는 이 당시 미국의 민중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른 폭력적인 납치사건들이 초기 공항 보안 조치를 촉진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미국 대중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킨 것은 쿠퍼의 무용담이었습니다.

 

 

 

 

 

 

 

최초의 비행기 납치사건은 1931년 페루에서 발생했습니다. 무장 단체는 선전 전단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조종사 바이런 리차드의 비행기에 접근해 리마 상공을 비행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당시 리차드는 이를 거부했고 무장 단체에 의해 석방되기까지 약 10일간의 교착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0년대 후반에서부터 1950년대까지는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탈출하기 위해 하이재킹을 시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냉전 시대에 서방 정부는 납치범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때까지만 해도 납치된 항공기의 목록에는 미국의 비행기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가 되고 나서야 납치범들은 미국 항공사들을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범죄를 일으켰던 사람은 대부분 미국에 살고 있던 쿠바인들로, 이런저런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당시 미국의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국 관리들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이재킹을 연방 범죄로 취급하였고 항공 보안 프로토콜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항공사 경영진들은 자신들의 재산에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안을 유발하는 보안 프로토콜의 구현을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새로운 법안은 하이재킹의 발생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범죄량을 줄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당국은 가능한 하이재킹으로 인명손실이 나지 않기를 바랬고 이를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68년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7월 23일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으로 알려진 테러 단체가 로마에서 텔아비브까지 가는 엘 알 항공기를 납치했기 때문입니다. 39일간 이어졌던 이 납치사건은 결과적으로 인명 손실 하나 없이 끝나게 되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폭력적이고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는 새로운 하이재킹의 시대가 열리는데 많은 일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부터 74년까지 미국 항공사는 130번의 납치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도슨의 필드 하이재킹으로 역시나 정치적 동기가 부여된 납치사건이었습니다. 1970년 9월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은 4대의 항공기를 납치하여 리비아의 도슨 필드에 강제 착륙시켰습니다. 인질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납치범들은 폭발물을 사용하여 4대의 항공기를 모두 파괴했습니다. 또한 1971년과 72년에 벌어진 두 그룹의 하이재킹은 비행기를 원자력 발전소에 충돌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1971년 11월 24일 지금은 대중에게 DB쿠퍼라 알려진 한 남성이 시애틀로 향하는 노스 웨스트 오리엔트 727편을 탔습니다. 이륙 직후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폭탄이 들어있는 서류가방을 보여주었고, 이후 20만 달러와 4개의 낙하산 그리고 도착지에서 연료를 추가하라는 글이 적혀있는 한 장의 메모를 조종사에게 보여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애틀에 도착한 쿠퍼는 돈과 낙하산을 받는 대가로 다른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쿠퍼는 조종사에게 멕시코로 비행하되 10,000피트 이하의 높이 200노트의 속도로 낮고 천천히 비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낙하산을 맨 쿠퍼는 시애틀과 네바다주 리노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1980년에 일부 돈이 회수되었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DB쿠퍼는 미국 여객기를 납치하고 돈을 요구한 최초의 사람이 아닙니다. 1970년 6월 4일 정부가 IRS와의 분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분노한 바클리는 TWA 항공기를 하이재킹 했습니다. 그 후 바클리는 1억 달러를 요구했으며 미국 대법원에서 청문회를 열기를 요청했습니다. 물론 바클리의 노력은 실패했고 이후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지만 그래도 아서 바클리는 최초로 하이재킹에서 돈을 요구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쿠퍼가 성공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몇몇 모방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요. 리차드 맥코이, 마인 맥넬리, 프레드릭 하네만 이들은 모두 하이재킹 이후 몸값을 챙겼고 낙하하는 데까지도 성공해 냈지만 결국엔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돈을 요구하는 하이재킹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미국 정부는 최초의 하이재킹 방지 보안 프로토콜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납치범이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금속 탐지기 및 X선을 사용하는 정도였습니다. 쿠퍼의 하이재킹 이후 항공사는 비행 중 후미 계단을 열 수 없도록 만든 쿠퍼 베인이라 알려진 장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시행된 프로토콜은 9/11 이후에 취해진 광범위한 보안 조치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로페즈 사건 발생 이후 연방 법원은  '모든 승객은 공항에서 자력계를 통한 무기 검색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합법이라 판결했고, 73년 데이비스 사건 이후 제9 순회 법원은 '정부가 승객을 납치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승객에 대한 무기 및 폭발물 검색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이재킹 방지 조치를 지지했던 이러한 판결들은 9/11 이후에 채택된 자세한 신원 확인, 무작위 검사 및 전신 스캔 등 보다 엄격한 보안 프로토콜을 신속하게 채택할 수 있는 강력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쿠퍼의 운명을 둘러싼 미스테리는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범죄 사건 중 하나일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범죄는 오늘날의 항공 보안의 모습을 갖추는데 많은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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