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영국의 범죄자 처벌방법 '지빗팅'

중세시대에는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 수십가지의 고문기구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문기구들이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대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역사학자들은 중세시대를 '고문의 황금시대'라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보통 중세시대의 고문기구들은 잔인한 방법으로 한번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장치들이 많았지만,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될만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살아있을때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도 영원히 고통을 줄 수 있는 '지빗(Gibbet)'이라는 이름의 고문기계를 사용했습니다.




지빗팅(Gibbeting)은 사람 모양을 띄고 있는 작은 케이지에 범죄자를 고정시켜놓은 후 공중에 매달아 놓는 고문관행이었습니다. 그들은 해에 대한 장시간의 노출과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목숨을 잃은 후에도 몇년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빗팅은 특히 1700년대 영국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 범죄자들을 '심판'하는 모습은 흥미로운 볼거리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빗팅은 그 순간 바로 직접적인 처형이 오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범죄자가 심판을 받는 날이면 나이에 상관없이 수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빗팅을 목격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매우 즐거운 일이었을지 몰라도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또는 이미 죽어있는 사람을 매달아 놓은 철제가 하루종일 삐걱거리며 움직였고, 시간이 지나 시체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 짧게는 몇달 길게는 몇년간 창문을 열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와 벌레가 범죄자들의 시체를 먹는 상황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빗은 시체가 완전한 해골이 될 때까지 제거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평균적으로 2~3년동안은 해당 장소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수년동안, 해당 시체와 함께 공존해야만 했습니다.




지빗 케이지를 만드는 임무를 맡았던 대장장이들은 구조에 대한 사전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대장장이들에 따라서 케이지의 디자인도 달라졌고 가격도 상당히 비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이 비싼 고문기계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빗이 주변 이웃 사람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비싸게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당국은 이 형벌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길 원했습니다. 끔찍한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형벌을 가능한 한 소름 끼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빗팅과 같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만 사람들이 법을 어기지 않고,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범죄행위를 줄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빗팅의 소름 끼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영국내 범죄가 전혀 감소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결국 1834년, 지빗이 사용된지 약 100여년 만에 공식적으로 영국 당국이 지빗의 폐지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시간이 지나, 한때 사용했던 지빗에 의한 처벌을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영국의 일부 도시와 지역에서는 '지빗에 매달려 죽었던 범죄자'의 이름을 거리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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