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킬때, 미군이 목격했던 이것

'다하우 강제 수용소'(KZ Dachau)에 최초로 수용되었던 이들은 정치범들과 나치에 비판을 가하던 종교인들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다른 수용소들과 마찬가지로 유태인이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먼훗날,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와 함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45년 4월 29일, 미군은 나치 정권의 최초 수용소였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향해 거침없는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이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던 수만명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자유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당시 다하우 수용소에는 총 67,0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 육군 제 20기갑 부대의 42 보병 사단과 45보병 사단이 다하우를 장악했을때 이들은 약 3만 2천여명의 희생자들을 메인 수용소로부터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죽음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던 이 기갑 부대는 그 이후에도, 나치 경비대가 미리 다하우 수용소로부터 이동시켰던 7천여명의 포로들의 목숨까지 구해주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보병 사단 소속의 '제임스 A.로즈(James A. Rose)'는 당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살아있는 해골'이라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더러웠고, 냄새가 났으며 두번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서야 우리는 이 전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함께 전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의 경비대들은 매우 오랫동안, 수감자들에게 공포를 가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는 32개의 막사로 구성되어있는 '수용소 구역과' '화장터' 2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옥사 및 조리장 안뜰을 '즉경 처형장'으로써 사용하기도 했었습니다.

 

 

 

1933년 6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가 개설되고 나서부터 1945년 4월 29일까지, 이곳 수용소에는 약 20만명의 포로들이 수감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약 3만 5천여명의 포로가 질병과 영양실조 및 자살등의 사유로 목숨을 잃었으며, 몇몇의 유대인들은 '인간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곳 수용소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죽음이 존하고 있었지만, 다하우에 수용되어있던 포로들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굶주림'에 의한 죽음이었습니다. 미군에 의해 풀려났던 생존자 '폴 슈나이더만(Paul Schneiderman)'의 말에 따르면, 굶주림에 의한 정신착란 때문에 포로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음식을 위해 싸움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가 해방되었던날, 미군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된 나치 경비대들은 포로들을 기차에 태워 후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미군이 훨씬 가까이 와있었고, 포로들을 호송하기 힘들겠다 생각한 나치 경비대들은 기차를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에 성공했던 3만2천여명의 포로중 약 1만명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수용소 근처 열차안에는, 조금전에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열차안의 시체를 본 미군들은 모두 격분하기 시작하였고, '나치의 개들을 모두 죽이자!'라고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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