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원자폭탄 속에서 살아남은 일본인의 비밀

미쓰비시 중공업의 엔지니어였던 29세의 츠토무 야마구치는 파견업무로 인해 히로시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파견업무를 마치고 다시 본인의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야마구치는 사무실에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잠시 집을 나섰을때, 그는 ''Little Boy''라는 별명을 가진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도시 상공에서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야마구치는 이 원자폭탄으로 인해 심한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일시적인 실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2009년, 야마구치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은 섬광탄 또는 엄청나게 지독한 번개와 같았으며, 눈을 떴을때 모든 것이 두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음과 폭발이 가라앉은 후 커다란 버섯 모양의 기둥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만화경의 패턴과 같이 복잡한 리듬으로 변화하는 프리즘형의 빛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다행히 원자폭탄 속에서도 목숨을 건진 야마구치는 자신의 고향 나가사키로 돌아가기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도시에 설치된 보호소에서 이틀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월 8일, 자신의 고향 집에 도착하게된 야마구치는 회사 상사에게 내일부터 출근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히로시마에서 겪은 일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두번째로 투하되었던 원자폭탄 ''Fat Man''이 그가 있는 나가사키를 강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마구치는 두번의 원자폭탄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다행히 그의 아내와 하나 있는 어린 아들도 이 폭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게 되었고 야마구치와 그의 가족들은 나가사키 폐허 근처에 설치된 보호소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훗날 야마구치는 '버섯구름이 히로시마에서 나를 따라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야마구치는 원자폭탄으로 인한 화상 및 방사선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고, 다시 새 직장을 구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야마구치는 핵과 관련된 언급을 피했고, 그 누구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원자폭탄의 생존자 중 한명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야마구치와 그의 가족은 방사선 피폭의 영향을 입은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약 20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원자폭탄에서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와 아들도 결국은 생존자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암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츠토무 야마구치씨는 자신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의 몸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핵무기 사용 반대 시위에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와 관련된 회고록을 썼으며, 그 주제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작성하기도 하였고, 2006년에는 유엔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Hibakusha, Our Life to Live''에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이 영화를 제작할때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자를 뜻하는) '히바쿠샤(Hibakusha)'를 165명 발견했는데, 그중 츠토무 야마구치는 두번의 원자폭탄 속에서 모두 살아남은,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히바쿠샤였다고 합니다.




2009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야마구치는 그가 살아 있을 당시 폭발로 인해 왼쪽 귀의 청력을 잃었으며, 백내장 및 급성 백혈병 그리고 여러 방사선과 관련된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원폭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뿐이며, 자신이 원자폭탄 속에서 두번이나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던 이유는 더이상 자신과 같은 원폭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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