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저주는 고대 이집트인의 무덤에서 미라의 안식을 방해한 이들이 저주에 걸린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도굴꾼이나 유명한 고고학자를 구별하지 않는 이 저주에 걸리면 불운한 일을 맞이하거나 병에 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 파라오의 저주는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거나 저술가를 통해 전해져와 우리에게 알려지게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의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여 미라를 꺼낸 이들이 연이어 불운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투탕카멘의 저주'는 현재까지 구전되는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중반부터는 많은 작가와 다큐멘터리에서 파라오의 저주가 박테리아에 감염되거나 방사선에 노출되는 것 등으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며 ‘사실’임을 주장했습니다.
룩소르에 있는 왕가의 계곡은 도굴을 막기 위해 생겨난 신왕국 파라오들의 묘소이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도굴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치 있는 재보는 전부 도난당했고 미라는 마구 짓밟혔습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을 면한 왕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투탕카멘 왕의 무덤입니다.
유명한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가 1922년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이 무덤을 발굴했을 때, 일상용품과 장신구 등 무수한 보물과 함께 황금관 속에 황금 마스크를 쓴 왕의 미라가 들어 있었습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 발굴은 이집트 고고학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최초 발견 당시 사람들은 무덤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황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묘는 전실, 부속실, 현실, 보물창고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엄청난 양의 금으로 장식한 관, 미라의 케이스, 호화로운 침대, 황금 옥좌, 호화로운 가구, 집기, 수많은 인형과 신상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5중으로 된 관을 차례차례 열어보니 미라를 담은 관이 나왔습니다. 온몸을 아마포로 칭칭 감은 미라의 얼굴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가면을 벗기고 겹겹이 둘러싼 아마포를 헤치니 무려 143개나 되는 온갖 보석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열여덟 살밖에 안된 파라오가 하늘 나라로 가지고 가려 했던 황금 보화는 엄청난 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제의 대상은 곧바로 다른 데로 옮겨갔습니다. 바로 '저주'였습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했던 관계자들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먼저 발굴의 후원자였던 카나번 경(卿)이 1923년 4월 5일, 57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원인은 모기에 물려서 생긴 패혈증이었습니다.
반년 후, 카나번 경의 처남인 허버트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24년 2월에는 카나번 경의 숙모인 엘리자베스 카나번이 벌레에 물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돌봤던 간호사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두고 세계의 신문들은 '파라오의 저주'라고 떠벌리기 시작했습니다.
발굴에 참여했던 교수들도 차례로 쓰러졌습니다. 1929년 11월, 하워드 카터의 조수였던 리처드 베셋이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습니다. 아서 메이스 교수는 관이 들어 있던 현실(玄室)과 벽 사이의 수직갱을 여는 순간 갑자기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X선으로 검사한 아티볼트 더글러스 리드 교수, 파라오의 관을 촬영했던 카메라맨 프랭크 로리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자 화이트는 "파라오의 저주로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미라를 직접 만지면서 조사를 벌였던 더글러스 테리 교수도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습니다.
투탕카멘의 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22명의 관계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저주'에 대해 고대 바이러스설, 미발견 질병설, 미지의 독극물설 등이 제기되었지만 지금까지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발굴에 참여했던 현지 인부들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최고 책임자였던 하워드 카터도 66세까지 살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어쨋든 이로 인해 투탕카멘 왕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투탕카멘의 마스크를 비롯한 3,500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된 이후 더 이상 '저주'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탕카멘의 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