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일어난 역사 블랙팬서 프레드 햄튼과 아만다 녹스 살인사건

12월 4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일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태어났고 블랙 팬서의 프레드 햄튼과 마크 클락이 살해되었으며 살인 혐의를 받은 아만다 녹스가 유죄 판결을 받은 날입니다.

 

 

 

 

 

 

 

 

1892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출생

1892년 12월 4일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태어난 날입니다. 스페인 갈리시아 주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집안 내력에 따라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려 했었지만 스페인 해군사관학교가 1906년부터 13년까지 문을 닫게 되면서 해군 대신 육군 보병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육군 생도로써 경력을 쌓기 시작한 프랑코는 불과 33세의 나이에 유럽 전역에서 가장 어린 장군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붕괴된 군사혁명에 참여하였고 스페인 내전의 주역이 되어 권좌에 올라 1939년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시스코는 이후 스페인에 군국 체제를 도입하였습니다.

 

 

 

 

 

 

 

 

1947년 국민투표를 통해 스페인을 왕정체제로 되돌린 프란시스코는 스스로 섭정이 되어 종신권력을 획득하게 되었고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스페인을 철권통치하였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8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투표소로 만들어진 정부 따위는 믿지 않는다. 스페인 국민의 열망은 투표함 따위로 표출되지 않는다. 스페인은 이런 바보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프레드 햄튼과 마크 클락 살해

1969년 12월 4일은 프레드 햄튼과 마크 클락이 살해당한 날입니다. 프레드 햄튼은 블랙팬서(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의 일리노이 지부의 지부장이었으며 마크 클락은 이곳의 회원이었습니다. 블랙 팬서는 경찰의 만행 및 인종차별로부터 지역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결성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그룹이자 무장단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프레드 햄튼은 달랐습니다. 그는 시카고 갱들을 중재하여 갱 전쟁을 막았으며 경찰들의 불법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료급식과 시민 교육을 제공하였고 흑인 사회를 넘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칸 원주민 등 약자 계층과 소수 인종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종과 상관없이 연대할 수 있도록 무지개 연합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 당시 FBI는 밀고자를 통해 프레드 햄튼의 거처를 알아내게 되었고 이후 불법 무기 수색을 빌미로 프레드와 마크를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에서 발생했던 90회 이상의 총격 중 단 한발만이 프레드와 마크가 쏜 것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FBI와 경찰들이 쏜 것으로 확인되며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FBI는 이 사건을 흑표당의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위장하려 했으나 법률을 잘 알고 있는 흑표당의 인사들이 이를 반박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FBI가 역 테러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FBI는 이후 그 아파트에 흑표 당원이 스무 명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프레드 햄튼과 마크 클락 단 두 명만이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13년이 지난 1982년, 미국 법원은 과잉적 살인으로 판결을 번복하며 각자의 유족들에게 185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09년 아만다 녹스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

2009년 12월 4일은 미국 출신의 교환 학생 아만다 녹스가 이탈리아 페루자의 한 아파트에서 그녀의 룸메이트인 21세의 영국 여성 메레리스 커쳐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된 날입니다. 미국 시애틀 태생인 아만다 녹스는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2007년 교환 학생으로 이탈리아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영국 여성인 메레리스 커쳐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룸메이트인 커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언론들은 ''아만다 녹스가 집단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메레디스 커쳐를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보도했으며 또 다른 용의자들로 아만다의 전 남자 친구인 라파엘 솔레시토와 루디 게데를 지명했습니다.

 

 

 

 

 

 

 

 

아파트에 있었던 식칼 손잡이에서 아만다 녹스의 DNA가 발견됐고 이후 이탈리아 경찰이 해당 식칼의 칼날 부분에서 살해당한 메레디스의 DNA검출되었다고 발표하면서 해당 DNA를 증거로 아만다 녹스는 징역 26년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항소를 제기한 아만다는 미국의 자국민 보호법을 활용하여 이탈리아가 아닌 미국의 법의학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아만다 녹스는 항소심 당시 울먹거리며 증언을 하는 모습들이 전파를 타 당시 미국 내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고 미국의 정치인들과 언론인 등이 아만다 녹스를 구출해야 한다는 식의 여론 형성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미 법의학 전문의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발표한 DNA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하며 칼 손잡이 부분의 DNA는 아만다 녹스의 것이 맞지만, 메레디스의 DNA는 아주 소량이었고 오히려 칼날 끝에 신원불명의 남자 2명의 DNA가 묻어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법의학 전문의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의도적으로 타인의 DNA는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미량의 메레디스의 DNA가 검출된 것을 토대로 메레디스와 아만다 녹스의 것만 발표하여 범인으로 몰았던 것으로 보여지며 이에 따라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11년 2심에서 아만다는 DNA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3월 26일 무죄 판결에 불복한 이탈리아 경찰의 상고로 다시 한번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때 법원은 녹스에게 1심보다 더 큰 28년 6개월 형을 선고했습니다. 집단 성관계 및 살인사건이 모두 녹스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 이탈리아 피렌체 대법원에서 열린 최종심 마지막 공판에서 대법원은 피렌체 고등법원의 유죄판결을 모두 기각하며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선고하여 아만다 녹스는 마침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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