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독일 과학자들을 포섭하여 만든 '이것'

나치군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길었던 2차 세계 대전의 끝이 보인 그 순간 미국은 또 하나의 골치거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주기술을 발전시키고 냉전에서 우위를 확보하길 원했던 소련이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전직 나치 독일 과학자들을 공격적으로 보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나치군이 항복하고 난 후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연합국들은 당시 독일의 군사 무기고가 얼마나 진보되어있는지, 그리고 적국의 무기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이와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미국도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과학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이 항복한지 불과 2개월만에 미국의 합동 참모 본부(Joint Cheifs of Staff)는 미국 최초의 비밀 모집 프로그램인 Operation Paperclip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그들이 원했던 유력한 후보자들을 만난 후, 폴더에 특정 색깔의 종이 클립을 붙여서 상사에게 다시 전달하였습니다.




1946년 9월경, Operation Paperclip은 공식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제한된 군사적 양육권'으로 미국에 입국하게된 1천여명의 독일 로켓 과학자들을 포함하도록 확대 승인받았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 이후, 천여명의 과학자들은 은밀히 미국으로 이주하여 과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Operation Paperclip에 의해 비밀리에 입국된 수많은 과학자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재능있는 사람은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이었습니다. 독일의 로켓 과학자 중 한명이었던 폰브라운은 독일의 로켓 개발 프로그램에서 일했으며, 세계 최초의 장거리 유도 탄도 미사일인 V-2 로켓을 설계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Peenemunde에 있는 작전 기지에서 탄도미사일의 탄두를 연구했으며, 대부분의 독일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치의 주요 당원이자 SS 장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독일에서 장거리 유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발전을 미국에서 이루었습니다.




폰브라운은 Operation Paperclip의 일원으로 선발된 직후 바로 본래의 발명품인 V-2의 설계를 바탕으로 탄도 미사일을 테스트하기 시작했으며 1953년에는 미국 최초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인 레드스톤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때, 그의 연구는 미사일 탄도보다는 우주개발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58년 미국 최고의 로켓 과학자로써 '마셜 우주 비행 센터(Marshall Space Flight Center)'의 책임자가 된 그는, V-2를 개량하여 주피터 G를 만들어 냈으며 그후에는 미국 최초의 인공 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체 '주노 1호 로켓' 개발에도 힘을 썼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미국은 우주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61년 4월 12일, 소련이 세계 최초로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가가린) 미국이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케네디 태통령은 '우주경쟁의 승리가 미국의 최우선 과제'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폰 브라운을 주축으로 한 아폴로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를 기반으로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을 밟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와 가가린으로 인해 떨어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폰 브라운은 미국 최고의 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Operation Paperclip의 회원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남겼던 것은 폰 브라운이었지만 그외 다른 회원들 또한 미국의 과학 기술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그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실시했던 이 Operation Paperclip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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