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은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민족에겐 수족과같은 무기였습니다.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외침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에는 활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기에 무인으로서 입신을 하고 성장을 하는 데 있어, 활을 잘 쏘는 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활을 접하고, 즐겨왔습니다.
특히 일분의 단순궁보다 사거리에 100미터나 길었던 우리나라의 '각궁'은 화약병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히 ‘최종병기’라 불릴 만큼 그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수련하며 활을 당겼던 옛 선조들, 그중에서도 고려 말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왜구와 맞선 단 한명의 노비 '이옥'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왜구라 불리는 해적무리와 싸움을 벌인것은 고대인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유구한 싸움이었지만 1350년을 기점으로 한 고려말기의 왜구들은 침공횟수,규모,전투력이 다른시대의 왜구들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더욱이 고려 말 왜구와의 사투는 고려라는 국가의 존망과 관련된 동아시아 혼란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의 고려는 정치조차도 무너져가는 상황이었기에 중대한 위기였습니다.
1350년부터 고려왕조가 역사상에서 사라진 1392년까지, 장장 40여년 동안 총 394건이나 되는 왜구의 침공기록이 남아있을만큼 고려말 왜구의 침임은 국가의 존립자체까지 위협받는 상태였습니다. 1372년(공민왕 21년 6월),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로서 중앙정부의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시기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국가를 전복시킬 만큼 규모도 크고 전투력도 갖춘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당시 왜구들은 강릉부와 영덕, 덕원 등 광범위한 지역에 정박하고 약탈과 백성들을 유린했는데도 우리 군사들은 적이 처들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하고 관노로 와있던 한 인물이 패잔병을 이끌고 적을 섬멸했습니다.
'이옥'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 지역에서 관노로 있었던 이옥은 고려 말 역적의 누명을 쓴 이춘부의 아들로 신돈이 척격되고 이춘부가 처형되자 관노로 강등돼 강릉으로 쫓겨난 처치였습니다.
이때, 왜구가 와서 동해에 정박하고는 고을에 불을지르고 노략질하여 백성들은 다투어 피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이옥의 용맹을 알고 있던 안렴사가 그에게 병정을 주어 왜적을 치게하였습니다. 당시 고을의 앞 들판에는 큰나무가 많았는데 전날밤 이옥은 사람들을 시켜 화살 수백개를 나누어 나무에 꽂아두게 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옥은 말을타고 바다어귀에 나갔습니다. 화살 두어개를 적에게 발사하다가 거짓패한체 달아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왜구는 그를 쫓았고, 이옥은 전날 밤 숲 속 곳곳에 꽂아 놓은 수백 발의 화살을 뽑아 쫓아오는 왜구를 차례로 쓰러뜨렸습니다.
한 몸으로 나무에 꽂아놓은 화살을 뽑으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싸웠는데 화실을 헛당기는 일이 없었으며 쏘기만 하면 반드시 명중하니 결국 왜구는 즐비한 사상자만 남긴 채 약탈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이옥은 그 후 복권돼 이성계 휘하에서 고관으로 승진했습니다.
한편의 드라마틱한 역사소설을 연상케하는 이 기사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도 골격은 같지만 내용이 약간씩 다른 관련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첩은 비록 짧막한 토막기사로 몇몇 문헌에 기록되어 있어 후대 사학자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지만, 뒤집어 보면 역사적으로 많이 소개된 어느 유명한 대첩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전투였습니다.
당시(14세기) 동아시아 정세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였고 만일 이옥이 왜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동해안이 점령당했다면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영토를 회복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복권되어 우왕 때 좌상시를 거쳐 강릉도절제사를 역임하며 오랜 기간 동해안을 왜구로부터 지켰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