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노예'라 불린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1866년 톰 위긴스(Tom Wiggins)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가 시카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곡했던 매나사스의 전투(Battle of Manassas)를 마지막으로 그의 콘서트를 끝마쳤고, 연주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립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19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 중 한명으로 언급되고 있는 '톰 위긴스'는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백인 주인을 모셔야 하는, 흑인 노예이기도 했습니다.




1850년 조지아 주 콜롬버스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톰 위긴스는, 당시 자유무역상이자 신문사의 편집자였던 제임스 닐 베튠(James Neil Bethune)이라는 이름의 남성에게 팔리게 되었습니다.




베튠이 그를 사들였을 당시 그는 위긴스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가 이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그가 노예에게 요구되는 일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 후 그는 그를 죽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위긴스가 일을 하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튠은 언젠가 부터 이 아이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살 경, 앞을 볼 수 없었던 위긴스는 베튠의 딸이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 소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살때부터는 귀로만 의지한채 피아노 기술을 혼자 습득하게 되었으며, 집중호우가 내리던 어느날 밤에는 The Rain Storm이라는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앞이보이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자폐증의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긴스는 소리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단 한번만 듣고도 음악을 그대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베토벤과 같은 정밀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58년 위긴스가 8살이 되었을 당시, 베튠은 친구 페리 올리버에게 위긴스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천재 피아니스트 위긴스는 미국 전역에 위치한 스타디움에서 4번의 콘서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해에만 그는 10만달러를 벌었고,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면 현재돈으로 1년에 270만달러(약 28억)의 수익을 올린 셈이었습니다.




블라인드 톰은 그 네번의 투어를 통해 19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긴스는 감정적 발달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콘서트를 열었을때 조차도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된 베튠은, 자신이 직접 위긴스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868년 18세가된 위긴스는 여전히 미국과 캐나다 전역을 여행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고, 매년 5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번 돈은 모두 '매니저'라 불리었던 베튠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베튠은 그와 돈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수익금을 이용하여 호화로운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위긴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예생활을 벗어난 상태였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의 장애 때문에 당시 베튠가족이 후견인으로써 그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재능이나 노동의 성과를 누릴 자유가 없었으며, 전생에 동안 베튠가족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존 베튠이 사망한 이후에도 위긴스의 재능을 이용하려는 베튠의 아내 때문에, 위긴스는 계속해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장기간의 법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위긴스의 마지막 콘서트는 190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뉴저지 호바켄에서 조용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최후의 노예'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19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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