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오늘의 역사 파블로 피카소와 수잔 스미스

10월 25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일

아쟁쿠르 전투가 발생했고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경기병대의 돌격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이를 살해한 수잔 스미스가 거짓 신고를 한 날입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 발생

1415년 10월 25일은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에서 아쟁쿠르 전투가 발생한 날입니다. 아쟁크루 전투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토를 두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발생했던 백년전쟁 중 일어났던 전투로 불리한 전력의 잉글랜드 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했던 사건입니다. 현대 역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아쟁쿠르 전투가 발생했을 때 프랑스군은 잉글랜드보다 최소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지휘관 헨리 5세의 뛰어난 지략 때문에 프랑스군은 최소 4,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고 잉글랜드 군은 100명에서 500명의 사상자 밖에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헨리 5세는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3세가 이루지 못한 프랑스 정복을 완성했고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트루아 조약을 맺어 자신 혹은 프랑스 공주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출생하게 될 아이가 앞으로 프랑스의 왕이 될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1854년 경기병대 돌격 실패

1854년 10월 25일은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경기병대가 돌격에 실패한 날입니다. 크림 전쟁 중이던 1854년 10월 25일 연합국과 러시아 제국간 벌어진 이 발라클라바 전투는 인류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희대의 막장 지휘 혼선을 보여준 전투이자 군사 전문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한 보병의 지원을 받고 진격하라는 것이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해 진격하라, 보병이 지원할 것이다로 잘못 전달되면서 혼선이 생기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놀란 대위가 선두에서 경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하다 순식간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700여 명에 달했던 부대원은 제11드라군 대대에서 14명, 제17 경기병 대대에서 17명밖에 살아남지 못하였으며 이후 재판이 열리긴 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사건이 종결지어졌습니다. 참고로 당시 총지휘관이었던 래글런 남작은 ''전쟁에선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라며 안하무인 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1881년 파블로 피카소 탄생

1881년 10월 25일은 스페인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날입니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파블로 피카소는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말도 배우기전에 그림부터 그리게 되었으며 천재적인 소질 때문에 아버지를 항상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 시절 다른 학생들은 한 달에 걸려 준비하는 과제를 단 며칠에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입학시험을 봤을 때도 일주일 걸리는 과제를 단 몇 시간 만에 완수해 입학 후 바로 월반하기도 했습니다.

 

 

 

 

20세가 되기전 고전주의를 거의 마스터했던 피카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던 당시 시대를 반영해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파블로 피카소 하면 떠오르는 이 큐비즘은 입체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 상태를 평면적으로 한 화면에 구성하여 표현한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등이 있으며 입체주의의 거장이자 천재 화가의 대명사인 피카소와 그의 그림들은 추상 미술의 모태가 되어 후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1994년 수잔 스미스의 허위 보고

1994년 10월 25일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호수에서 두 아들을 살해한 수잔 스미스가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한 날입니다. 수잔 스미스는 당시 경찰서에 전화해 흑인 남성이 자신의 차로 뛰어들어와 총부리를 겨눈채 계속 운전하라고 협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잔은 남자에게 아이들을 봐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남자가 자신을 차 밖으로 밀쳐낸 뒤 두 아들만을 태우고 그대로 도주했다고 전했습니다. 방송에 출연해 울먹이며 도움을 호소했던 수잔 스미스의 사건은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중 수사가 들어가고 채 10일이 지나지 않은 1994년 11월 3일, 계속된 심문과 거짓말 탐지기에 심리적 압박을 느낀 엄마 수잔 스미스가 자신이 아이들이 탄 차를 호수에 빠뜨렸다고 말하며 당시 남편이 아닌 만나던 다른 부유한 남성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살해하게 됐다고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는 호수 4m깊이에서 발견되었으며 3살 및 14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익사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스미스는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30년 후 가석방이 가능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그곳에서도 교도관, 교도소장과 성관계를 가지는 등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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