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역사적 사건 : 노벨상 제정,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및 이소룡 탄생

11월 27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이 제정되었고 최초의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가 개최되었으며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이 태어난 날입니다.

 

1895년 노벨상 제정

1895년 11월 27일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이 제정된 날입니다.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사람이자 노벨상을 제정한 위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내면 국가들끼리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다이너마이트가 대량 살상 무기로 쓰였고 이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 알프레드 노벨은 인류에 조금이라도 공헌을 하기 위해 노벨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재산 전체를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사람들''에게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유언장에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국가간의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족 및 친척들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그의 요청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국왕 오스카르 2세도 노벨을 비난했었습니다. 그러나 유행 집행자인 랑나르 솔만의 결단으로 노벨의 재산이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남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노벨의 재산 94%를 기반으로한 첫 번째 노벨상 수상식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첫 번째 노벨상은 노벨이 죽고 5년 후인 1901년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924년 최초의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 개최

1924년 11월 27일은 뉴욕시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개최한 날입니다. 2009년 부산 신세계 센텀 시티에게 기록을 넘겨주기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뉴욕의 메이시스 백화점은 최초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개최했던 1924년 이래로 매년 퍼레이드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본사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지만 메이시스를 대표하는 상점은 단연 뉴욕 맨해튼 헤럴드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 이 백화점이며, 메이시스는 2008년 기준으로 미국에서만 총 810개의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는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약 3시간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4km에 이르는 거리를 행렬하는 동안 애니메이션, 영화 캐릭터 등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인물을 본뜬 대형 풍선과 유명한 스타들의 공연 무대 등이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이용한 판촉행사로 시작됐던 퍼레이드가 이제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최고의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올해로 96회를 맞이한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1940년 이소룡 탄생

1940년 11월 27일은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이 태어난 날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유명 경극배우였던 중국인 아버지 이해천과 중국계+독일계 혼혈 어머니 하애유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이후에는 부모님의 고향 홍콩에서 자라게 된 이소룡은 경극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부터 배우로 활동했지만 지금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몸이 매우 약해 잔병을 달고 살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술을 배우게 된 이소룡은 무술 실력의 기본이 된 영춘권을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에게서 배우게 되었고 이후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인 채리불권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시애틀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이소룡은 이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입학과 동시에 복싱, 유도, 태권도, 가라테, 사바트, 말레이시아 권법 등 다양한 무술을 배운 이소룡은 이 모든 무술들을 바탕으로한 진번쿵후라는 이름의 무술을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무술을 가르치는 것이 주업이고 영화에는 단역 정도로만 출연했던 이소룡은 1970년에 홍콩으로 돌아갔다가 당산대형에 캐스팅되어 영화를 찍게 되었고, 이 영화가 흥행 기록을 세우게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작품 정무문과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 용쟁호투 등을 찍게 되었지만, 용쟁호투의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용쟁호투는 전 세계적으로 9,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흥행 기록을 수립하였고 이소룡의 무술 철학을 집결시킨 작품이 될 예정이었던 사망유희는 미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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