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데이 날짜와 귀신이 출몰하는 미국의 고스트 스팟에 관한 전설

10월은 할로윈 시즌입니다. 고대 켈트족 축제에서 유래된 이 할로윈은 만성절 전날인 10월 말 죽음의 신에게 제를 올림으로써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악령이 혹여나 해를 끼칠까 두려워 자신 또한 악령과 같은 모습을 가지기 위해 무서운 가면을 쓴다는 할로윈 축제, 오늘은 이 할로윈 시즌을 맞이하여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난 미국의 세 장소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레센트 호텔

아칸소주 유레카 스프링스에 위치하고 있는 크레센트 호텔은 호러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할로윈 시즌에는 귀신을 보려는 손님만으로 객실이 가득 찰 정도이며 실제로 귀신과 비슷한 형상이 찍힌 사진도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1930년 후반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호텔을 개조해 병원으로 만든 노만 베이커는 의사가 아니라 보드빌 마술사였습니다. 그는 air calliaphone이라는 악기를 팔아 부자가 되었고 그의 병원은 수박씨, 옥수수 실크, 클로버 추출물을 함유한 속칭 '기적의 약'을 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병원에는 그 흔한 청진기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6주 안에 암이 치료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광고로 암 환자들을 불러들였지만 그의 진찰은 꼬집거나 바라보는 것 정도만 이루어졌고 질병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은 처방만을 내렸습니다. 당연히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 크레센트 호텔의 유령이 이전 병원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라 믿고 있으며, 병원 공사 중에 사망한 마이클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는 현재 218호실에 머물고 있다 말했습니다.

 

 

 

 

 

머서 하우스

조지아나 주 사바나 몬터레이 광장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스테리로 뒤덮여 있는 머서 하우스는 역사 전반에 걸쳐 발생한 비극적 사건들을 통해 왜 이 집에 귀신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서 하우스라 불리고 있는 이 집은 남북 전쟁 당시 휴 위든 머서 장군의 요청으로 건축가 존 노리스에 의해 지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머서 장군의 가족들은 이 집에 단 하루도 살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이집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집이 지어지고 난 후 약 1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새 소유자 짐 윌리엄스는 사바나의 역사와 건축물을 사랑했던 골동품 상인으로 2년에 걸친 세심한 복원 과정을 통해 머서 하우스를 성공적으로 개조하여 다시 한번 멋진 장소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그의 연인 대니 한스 포드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의 행복도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윌리엄스는 한스 포드의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후 네 번의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재판에서는 종신형을 받았지만 모순되는 경찰 보고서로 인해 결국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죠.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윌리엄스는 자신의 집에서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습니다.

 

 



무죄를 선고 받고 나서부터 그의 죽음까지는 6개월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당시 윌리엄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자 친구의 영혼이 집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여자 친구의 모습 때문에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가자 윌리엄스는 그녀의 영혼을 없애 버리겠다며 부두교에도 손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그의 죽음으로 끝난 걸로 봐서는 도움이 전혀 되질 못했던 것 같은데요 당시 그의 시신이 여자 친구가 총을 맞고 죽은 장소와 거의 같은 위치였던 것을 봐서는 윌리엄스가 그녀를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한스 포드가 복수심에 윌리엄스 앞에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머서 하우스에서의 죽음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윌리엄스의 죽음 이후 비어져 있던 집에 토미 다운이라는 이름의 11세 소년이 새를 쫓아 집에 들어왔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낙상에 의한 사망이라 결론 지어지긴했지만 당시 같이 있던 토미의 친구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 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가 혼자 있었음에도 말이죠

 

 

 


시간이 오래 지나 사람이 살수 없게 된 머서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곳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어 머서 하우스를 찍어냈습니다. 이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보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유령 사진은 흔치 않지만 머서 하우스를 방문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번 보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금발 머리를 가진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집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즉시 토미를 떠올렸습니다.

다른 도시전설과 마찬가지로 이 집 또한 표시가 없는 무덤 바로 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렘프 멘션

미국에서 귀신이 제일 많이 나오는 장소 중 하나인 렘프 멘션은 연속적으로 발생한 렘프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라섰던 아버지 아담 렘프의 죽음 이후 양조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윌리엄 렘프는 거대한 동굴 위에 있는 부지를 매입하여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1864년 체로키 스트리트와 캐론돌렛 에비뉴에 새로운 공장을 완공시켰고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세인트 루이스 맥주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가족들은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죠

 

 

 


1876년 집을 하나 구입한 렘프는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었던 집을 개조해 33개의 방을 만들었고 이후 멘션 지하를 시작으로 양조장까지 이어지는 긴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동굴의 일부는 강당과 극장으로 사용될만큼 엄청난 크기의 지하 터널이었습니다. 1890년대 중반 렘프는 Falstaff 브랜드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비즈니스 제국을 더욱더 탄탄히 만들며 안정권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윌리엄 렘프가 가장 아끼던 아들이자 상속자인 장남 프레드릭 램프가 2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에 빠진 윌리엄은 그 후로 대중 앞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으며 이후 가장 친했던 친구마저 죽음을 맞이하자 1904년 2월 13일 스미스 앤 웨슨 38 구경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1904년 11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윌리엄 렘프 주니어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하인들로 집을 가득 채우는 등 상속받은 재산을 마구 쓰기 시작한 렘프 주니어는 곧 그의 아내에게도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에 천 달러씩 돈울 매일 내어주며 하루에 다 사용하지 않으면 앞으로 돈을 아예 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내가 돈을 사용하기 위해 밖을 돌아 다니는동안 친구들과 매춘부들을 불러 맨션 아래 동굴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즐겼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그는 결국 아내가 아닌 여자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소년이 존재했다는 공식적인 문서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이 소년이 평생 저택 다락방에 숨어 살았다는 건 사람들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인트 루이스 역사가 조 기번스가 오래전에 렘프 저택에서 일했던 전직 유모와 운전사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두 사람 모두 그 소년은 분명히 존재했고 다락방에 갇혀있었으며 다운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06년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있던 9개의 대형 양조장들이 결합하여 독립 양조장 하나를 설립했습니다. 이로인해 렘프 양조장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 16일 윌의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하였고 거대 라이벌로 인해 양조장 수입이 계속해서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한 윌리엄 주니어는 세인트루이스 양조업자 캐스퍼 쾰러의 딸 엘리 림버그와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각 가족 구성원들은 이미 부유했기에 양조장을 굳이 이끌어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한때 윌리엄 주니어는 의회가 금주법을 폐지하기를 바라기도 했었지만 결국 마음을 접고 아무런 통지도 없이 렘프 공장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1922년 Falstaff 브랜드를 2만5천달러에 판매했고 금주법 이전에 7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던 양조장을 58만 8천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이자 윌리엄 주니어의 여동생인 엘사 렘프 라이트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여동생의 자살과 렘프 가문의 몰락을 겪은 윌리엄 주니어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22년 12월 29일 그는 18년 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38 구경 리볼버로 자신의 심장에 총을 쏘아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윌리엄 주니어의 형제 찰스와 에드윈은 오래전부터 가업을 떠나 평범한 삶을 살았었는데 1943년 윌리엄 렘프 3세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찰스가 윌리엄 주니어의 사생아와 함께 렘프 멘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래지나지 않아 사생아가 30대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고, 찰스 또한 렘프의 가족 중 네 번째로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렘프의 가족 중 유일하게 비극을 피한 에드윈은 1970년 90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는데 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찰스가 사망한 후 렘프 저택은 매각되었고 75년 딕 포인터와 그의 가족이 건물을 개조하여 식당과 여관을 오픈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안의 일꾼들은 종종 귀신, 이상한 소리, 사라지는 도구, 감시당하는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레스토랑 직원들은 무언가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목소리가 들린다 물체가 스스로 떨어진다 문이 저절로 잠기고 열리며 조명이 의지에 상관없이 켜지고 꺼진다. 그리고 종종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피아노가 연주된다고 말했습니다.

 

 

 


다락방에서는 당시 원숭이 얼굴 소년이라 불리었던 윌리엄 주니어의 사생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이 불쌍한 영혼은 평생을 렘프 맨션 다락방에만 갇혀 살았습니다. 맨션 바깥에서는, 작은 창문으로 거리를 엿보려는 소년의 얼굴을 간혹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영매사들이 장난감을 방 한가운데 두고 주위에 원을 그려 물건이 옮겨지는지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돌아오면 장난감이 항상 다른 위치에 있었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 있는 여자 화장실에서는 누군가 엿보고 있다며 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그럴 때마다 바텐더가 항상 누구도 바를 떠난 사람이 없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화장실은 윌이 세인트루이스 최초로 독립형 샤워 시설을 갖췄던 곳이라 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윌리엄 주니어가 지켜봤던게 아닐까 싶네요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